세수하다가 허리 삐끗? 물리치료사가 알려주는 진짜 이유

세수하려고 허리를 숙였을 뿐인데 그대로 못 펴본 적 있으신가요? 양말을 신다가, 바닥에 볼펜 줍다가, 아이를 안아 올리다가 그렇게 되신 분들도 많습니다. 무거운 것도 안 들었는데 왜 하필 그 순간이었는지 저도 처음엔 이해가 안 됐습니다. 물리치료실에서 18년째 일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바로 "그냥 세수하다가 이랬어요"거든요.
무거운 것보다 더 위험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호주 시드니의 1차 진료기관 300곳에서, 갑자기 허리가 아파 찾아온 999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있습니다. 통증이 시작되기 직전 96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12가지 항목으로 나눠 물었는데요, 결과가 꽤 놀라웠습니다.
- 다른 데 정신이 팔린 채로 몸을 쓴 것: 약 25배
- 무거운 물건을 든 것 (20세 기준): 약 13.6배
- 무거운 물건을 든 것 (60세 기준): 약 2.7배
무거운 물건의 위험도는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낮아집니다. 살아오면서 몸이 적응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딴 데 정신이 팔린 채로 몸을 썼다"는 조건은 나이와 상관없이 25배로 가장 높았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 아침이 많을까요? 밤새 누워 있어서 척추 사이 추간판에 수분이 가득 차 잘 굽혀지지 않고, 자세를 잡아주는 속 근육들은 아직 덜 깨어 있고, 출근 시간에 쫓겨 마음까지 급한 상태. 세 가지가 딱 겹치는 시간이 바로 아침입니다.
원인을 못 찾겠다는 느낌, 사실 당연한 겁니다
같은 999명에게 "본인이 생각하기에 뭐가 원인인 것 같습니까"를 물었더니, 무거운 것을 들었다는 항목은 잘 기억했지만 "딴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항목은 거의 아무도 지목하지 못했습니다.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억에 남지 않으니까요. 전화를 받으면서 허리를 숙인 것도, 나중에 떠올리면 그냥 "세수하다가"로만 남습니다.
2018년 Lancet 요통 특집에서도 거의 모든 허리 통증에서 특정한 구조적 원인을 딱 하나 짚어내기란 어렵다고 정리했습니다. 골절이나 종양처럼 분명한 원인이 있는 경우는 극히 일부입니다. MRI가 정상으로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문제가 구조가 아니라 그 구조를 쓰는 방식에 있다면 사진엔 찍히지 않습니다.
범인은 그 동작이 아니라 매일 반복해 온 '방식'입니다
이사는 몇 년에 한 번이지만, 세면대 앞에서 허리를 숙이는 동작은 하루 최소 대여섯 번, 1년이면 2천 번이 넘습니다. 설거지, 신발 신기, 세탁기에서 빨래 꺼내기까지 합치면 훨씬 많아지죠.
허리를 숙이는 동작은 원래 고관절이 대부분을 담당하고 허리뼈는 조금만 거드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고관절이 뻣뻣하거나 주변 근육이 제 역할을 못 하면, 그 몫이 고스란히 허리뼈로 넘어갑니다. 같은 숙이기라도 고관절이 접히면서 숙이는 사람과 허리만 말리면서 숙이는 사람은 1년 뒤 허리가 받은 부담의 총량이 다릅니다.
요즘 "허리를 절대 굽히지 마라"는 말이 많이 퍼져 있는데, 근거는 생각보다 단정적이지 않습니다. 허리는 굽으라고 있는 관절입니다. 문제는 굽힘 자체가 아니라, 고관절이 쓰이지 않고 허리만 혼자 굽는 방식이 매일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이미 삐끗했다면, 처음 며칠이 중요합니다
"며칠 꼼짝 말고 누워 있어라"는 말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데요, 무작위배정 연구 10편·참가자 1,923명을 분석한 코크란 검토에 따르면 급성 요통에서는 "누워서 쉬세요"보다 "가능한 범위에서 움직이세요" 쪽이 통증과 기능 모두에서 조금 더 나았습니다.
여기서 "움직이세요"는 운동하라는 게 아닙니다. 집 안을 조금씩 걷고, 앉은 자세를 자주 바꾸고, 일상 동작을 아프지 않은 범위에서 유지하시라는 뜻입니다.
- 소변이나 대변을 참기 어렵거나 반대로 나오지 않는다
- 사타구니나 항문 주변 감각이 둔해졌다
- 다리에 힘이 빠져 발끝이나 뒤꿈치로 서기가 어렵다
- 넘어지거나 부딪힌 뒤에 시작된 통증이다
- 열이 나거나 원인 모를 체중 감소가 함께 있다
- 누워서 쉬어도 통증이 줄지 않고 밤에 더 심해진다
- 암 치료를 받은 적이 있거나 스테로이드를 오래 복용 중이다
통증이 가라앉은 뒤가 오히려 더 중요한 시기입니다. 숙이는 방식, 앉는 방식, 아침의 급한 마음이 그대로라면 조건은 그대로 남아 있거든요. 아무것도 아닌 동작에 삐끗한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동작에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앞으로 뭘 바꿔야 할지 조금 더 보입니다.
